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홈은 영혼이자 신체다. 점과 선으로 연결된 참나의 발견이다. 삶을 극복하는 것은 발효된 깨달음이자 세상을 향한 내 작업의 메아리가 아닐까 한다.” - 세비가 인터뷰 중에서
여기 원형(元型/archetype)의 붓질을 점에서 연결된 길(線/line)과 연동해 변주하는 작가가 있다. 노마드적 영혼을 가진 세비가CEVIGA 작가는 인터뷰에서 영혼의 저장소인 집(Way Home)을 하나의 길로 표현했다. 개념적 본질주의로 환원하는 아름드리 작품들은 과거의 시공간이 쌓여 연동하되, 동일한 반복이 없고 순수한 본질을 바탕 삼은 다층의 기억이 형상화된 것이다. 작품에는 점으로 수렴되는 블랙홀 같은 에너지와 이를 확산하는 세상을 향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세비가(世琵嘉)를 동양적 사유로 환원하면 “영원히 함께하는 아름다운 연주”로 번안해도 좋을 듯하다. 작가는 집으로의 길을 “낙타가 본질적으로 좇는 물길”에 비유했다. 이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의 시 〈가지 않은 길〉로도 연결된다. 여러 갈래의 인생길에서 삶은 늘 선택을 요구한다.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 길만을 택해 살아야 하는 삶에서 작가는 “자취가 적은 길이라도 내 삶을 위해 걸으라!”고 손짓한다. 낙타의 물길처럼 세비가의 ‘길’은 선이자 점으로 환원된 수많은 상상력과 가능성이다. 직관적 드로잉에서 파생된 작품들은 과정-방향-도리-미래-전망 등의 추상적 의미를 지닌다. ‘물길’은 곧 인생의 도전을 의미한다. 이 길을 따라 끝없이 가다 보면 들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우리의 사유지가, ‘인생의 진짜 길(참된 나의 발견)’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물길은 곧 세비가의 나침반이다.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자유분방한 선의 모티브들이 춤을 추며 묵묵히 자신의 ‘길’은 연다.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뭉클한 시선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본성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삶이 고되고 답답한 현실의 꽉 막힌 공간이라도, 작가의 시선을 좇다 보면 어느새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길과 만난다. 거짓된 외연을 가로지른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이상적 자아(自我)의 실체를 발견하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이 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2002년 9월 21일 큰 화재를 겪은 작가는 스스로 시적 화자(話者/畵者)가 되어 고통어린 현실을 극복하고 이상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성찰의 과정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린 점 하나가 책 한권의 분량이 되기까지 부지불식(不知不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작가는 아침에서 저녁으로 다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눈먼 장님 같은 현실’ 속에서 ‘물길을 찾아 떠나는 낙타’와 같은 회귀적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작품 <오후 5시의 까마귀들>, <거북이와 하얀 선물 봉지>, <고양이가 물고온 노란 풍선> 등의 이중적 언어들은 초현실적 상징을 통해 시각 너머의 색다름의 미학(Quaint Novelty)을 보여준다. 언어적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초현실주의의 한 기법)은 절망의 순간에 쳐다본 ‘푸른 하늘’과 같은 희망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삶 속에서도 늘 다시 걷고자 다짐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래선지 세비가의 작품은 지난날을 회상하는 동시에 꿈을 꾸는, 아프지만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삶의 모든 순간-점點의 메타포, ‘Life Mapping’
세비가의 최근 작업은 지속적인 순간의 깨달음을 여러 겹의 레이어로 쌓아간 ‘시간에 대한 경의’이다. 이는 석도(石濤, 1642~1707)의 일획론(一劃論)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무한한 창조적 가능태로서의 혼돈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세계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면서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세비가의 붓은 움직임이 빠르고, 꾸밈새가 매끄럽고, 자리 잡음이 편안하다. 자연스러움이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작가의 움직임이 서예를 하듯 매끄럽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깨달음을 형식적이고 명확한 제스처로 표현한다. 이른바 개념적 표현성은 ‘사유의 영역에 뿌리를 둔, 다름의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동일한 행위성임에도 같은 순간이 없으므로 같은 형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작품의 생성과정과 연동한다. 삶의 수많은 점들이 ‘라이프 매핑’으로 연결됨으로써 ‘인생의 길’이 되고 새로운 작품의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한 이후, 질병으로 인체와 영혼이 시험에 든 느낌을 받았고, 회복한 후 삶의 새로운 방식을 작품 제작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가 인지하지 못한 ‘두려움과 고통’마저 직관적이되 뚜렷한 제스처로 극복함으로써, 한국인 특유의 ‘다이나믹한 긍정의 에너지(Dynamic Soul of Positivity)’를 붓질로 연결한 것이다. <Saltsugar>, <Velvet Vocabulary>, <Banana Fly>, <Sunshine Soul> 등에서 읽히는 장난스러운 어조는 불안하면서도 유쾌한 ‘풍자적 해학미(Satirical Soul)’를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신 형상들은 붓의 획(Strokes of Brush)을 유영하는 움직임의 흔적들로, 국문/영문 제목 모두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단어들 사이의 뉘앙스(Nuances between words)’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작가의 어떤 그림도 동일한 것은 없다. 차이의 반복을 통해 ‘다름의 가치’를 유도함으로써 동일한 사람이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볼 때마다 다른 변주의 미감(View of variations that change depending on the situation)’을 창출하는 것이다.
한국적 행위 추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비가의 추상은 추상표현주의의 오랜 유산을 활용하지만, 해학적 풍자를 결합한 ‘깨달음의 시각화(Visualization of Enlightenment)’를 통해 내면과 외면을 종합한다. 생각이 득도(得道)가 되고 몸의 행위가 붓질이 되는 순간, 진정한 자아는 선명하게 드러난 완성도 있는 작품들로 거듭난다. 이른바 마음먹은 대로 행해지는 《화엄경(華嚴經)》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뿌리에 두고 삶의 불안정한 여정을 ‘유레카의 순간(Eureka's momen;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세비가 작가는 순간의 경험들이 모인 ‘모순과 변형의 시·공간(지금-여기의 삶)’을 아름다운 과정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자기 발견의 순간들은 조각과 캔버스, 3차원과 2차원을 종합하면서 ‘세비가의 다중우주(the multiverse of CEVIGA)’를 창출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지성 푸코(Michel Foucaul, 1926~1984)는 현실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비가의 작품은 현실 속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천재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은 대표 시(詩) <거울>에서 자아의 모순이 빚어내는 비극적인 자의식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노래한다. 자의식을 시대 인식과 연결해 ‘초월적 감각’으로 종합한 미감은 100여 년의 세월을 가로지른 ‘세비가의 시각예술’과도 연동된다. 때로는 비상식적인 난해함을, 때로는 지적인 유쾌함을 보여주는 창작 태도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향한 새로운 영토의 확장, 이른바 ‘예술적 헤테로토피아’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WAY HOME: The Camel Knows the Water Way
Ahn Hyunjung (Art critic/Ph.D. in Art Philosophy)
"Home is the soul as well as the body. It's the discovery of truth connected by dots and lines. Overcoming the limits of life should be called a ‘fermented realization’ and an ‘echo of my art works’ towards a better world."" - Said by CEVIGA in an interview.
In an interview, the painter CEVIGA, with a nomadic spirit, described the "Way Home" as a single path, representing the repository of the soul. Her countless works, resulting in conceptual essentialism, intertwine the accumulated time and space of the past, yet are devoid of identical repetitions, embodying multi-layered memories based on pure essence. Her works contain energy like a black hole converging into points and possibilities diffusing towards the world. If we were to reframe CEVIGA from an oriental point of view, her work might be translated to "a beautiful performance that lasts forever together." The artist likened the path to home to "the water way inherently followed by a camel" a connection that also ties into Robert Frost(1874~1963)'s poem "The Road Not Taken." Life demands choices amid various paths, and despite conflicts, in a life where one must choose only one path to follow, the artist gestures, "Even if it's a path less traveled, walk it for your own life!" Like the water way of a camel, CEVIGA's 'path' is about a multitude of imaginations and possibilities distilled into lines and dots.
Every moment of life - a metaphor of dots, 'Life Mapping'
Let's take a closer look at the artist's works. The motifs of free-flowing lines dance as they quietly pave their 'path.' With a solemn yet poignant gaze, the artist embarks on a journey to rediscover our lost nature. Even in tough and suffocatingly confined spaces of reality in life, if you follow the artist's perspective, you are led to a path where they unexpectedly encounter their lost selves. It suggests discovering the essence of the ideal self through the inner voice that breaks through false exteriors. This is akin to the essence of 'light' emerging from 'darkness.' CEVIGA's recent works are an homage to time, layered with continuous moments of enlightenment, resonating with the principles of Seokdo(1642~1707)'s One Stroke Theory. It simultaneously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chaos as an infinite creative potential while also valuing individuality within the perception of the world as a single organism. CEVIGA's brush strokes are swift, her embellishments smooth, and her placements comfortable, as her movements flow effortlessly like calligraphy being natural and seamless. She expresses this awareness through formal and clear gestures. After overcoming the COVID-19 pandemic, the artist felt a sense of trial on both the body and soul due to the illness. Following her recovery, she began to reflect on life's new ways in her artwork. She overcame the unrecognized 'fears' and 'pain' of our society with her intuitive and distinct gestures, connecting them with the unique 'Dynamic Soul of Positivity' inherent to Koreans through her brushwork.
Korean action abstraction, "Everything Is Up To Mind"(一切唯心造)
CEVIGA's abstractions employ the longstanding legacy of abstract expressionism but combine it with satirical metaphors through the 'Visualization of Enlightenment,' integrating the inner and outer. When thoughts become enlightenment and bodily actions become brush strokes, the true self vividly emerges through completed works. This is akin to the principle of "Everything Is Up To Mind" rooted in the Huayan Sutra, depicting life's uncertain journey as 'Eureka's moment.' These moments of self-discovery create the 'multiverse' of CEVIGA blending sculpture and canvas, 3D and 2D. One of the greatest intellects of the 20th century, Michel Foucault(1926~1984) proposed the concept of 'Heterotopia' performing utopian functions within reality although utopia does not exist in reality. CEVIGA's works could be regarded as heterotopia in reality. A genius poet Yi Sang(1910~1937) of the tragic self-consciousness born of contradictions in his masterpiece poem "Mirror," using surrealistic techniques. The aesthetics that connect self-consciousness with the spirit of the times and integrate them into 'transcendental senses' are intertwined with 'CEVIGA's visual art' spanning over a century. CEVIGA's creative attitudes which sometimes display unconventional complexity and other times intellectual delight can be seen as an expansion of human inner worlds, an 'artistic heterotopia,' so to sp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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