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 레이어, 현(絃/炫)의 확장
“평면성,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의 평면은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었고 저의 평면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이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
김현식은 “평면은 공간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공간의 기하학을 동·서 건축의 보편성 속에서 구축한다. 근작들을 보면 종묘정전(宗廟正殿, 국보 제227호)의 장엄함과 데이빗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본사’ 건물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종묘 건축과 연계해서 선적 레이어를 동시대 회화 인식으로 연결해 ‘한국 미감’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평면을 공간으로 인식한 테제는 원근법을 발견한 르네상스 건축인들의 ‘재현적 세계관’과 통하고, 평면을 입체로 되돌려놓은 프랭크 스텔라의 ‘자기반성적 세계관’과도 연결된다.
평면 안에 미술사(美術史) 자체를 옮겨놓은 김현식만의 고민은 아무도 구축하지 못했던 ‘개념형 추상의 본질’을 다룬다. 평론가 이진명은 평면을 역사적 서술 속에서 공간화하는 심층 투사의 시각을 ‘현(玄)의 예술’으로 명명하고 김현식의 작품 세계를 ‘현(玄)의 시각화’ 속에서 해석했다. 평면성의 근본을 향한 고민은 한국 단색화가들이 정신주의와 명상성을 전제로 한 동양 주의로 복권할 때마다 간과하게 되는 추상 형식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평면성의 구조 속에서 화가가 추구해야 할 엄격한 철학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규정 안에서의 변주를 꾀한다. 제1회 하인두예술상에 만장일치로 선정된 이유 역시, ‘동·서미감을 집요한 작가정신으로 파고 들어간 탁월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바탕이 확장되는 방식, ‘현(絃/炫)’의 구현
김현식의 작업은 선적 미감을 한국 건축공간처럼 풀어낸 정적이면서도 활력이 있는 ‘적조미(寂照美)’를 드러낸다. 고요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날아갈 듯 치켜 올려진 처마의 자유로움이 평면 속에서 깊이 있는 명상 미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한국건축의 품격과 적조한 성정을 드러낸 '종묘정전'이 현대 추상회화로 옮겨온 듯하다. 길게 이어진 웅장한 선현(善賢)들의 정신, 선의 미감을 역사의 깊이로 드러낸 레이어, 한국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사유의 다층구조'는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의 성취를 추구한 ‘조선 건축의 바탕’과도 닮았다. 실제 한국건축미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종묘정전은 건물 한 칸 한 칸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
단순한 구성을 한 신실이 모여 하나의 장대한 수평적인 건축 형태를 만들면서, 양 끝은 협실로 이어지고 동·서월랑은 직각으로 꺾여서 정전을 좌우에서 보위한다. 이처럼 월대가 광대하게 펼쳐지면서 공간을 장대하고 엄숙하게 만들지만, 그 안에서 개별 구조들은 평등한 시선으로 공간을 이룬다. 김현식의 평면 공간이 지극히 단순 질박한 것처럼, 길게 연속된 종교 정전의 압도적인 장엄함은 다른 어떤 건축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이른바 “최후의 인격, 이상적 관망자로서 성인(聖人)이 추구해낸 단아하고 깨끗한 미감”이 평면에 직선을 이룬 간결함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해체라는 측면과도 맞닿는다. 프랭크 스텔라가 모더니즘 규범들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꾸준한 실험가였던 것처럼, 김현식은 극으로 밀고 간 평면성의 딜레마를 ‘현(玄)의 바탕’ 위에서 실험한다. 추상회화 고유의 속성을 극으로 밀고 간 결과, 모더니스트의 시각에서는 양립 불가능한 사물성과 시각성이라는 모순적 존재 양태를 작품 속에서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최근 더욱 확장하고 있는 ‘평면의 공간화’는 예술과 현실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직선을 무한대의 내면으로 밀어 넣는 바탕의 확장을 보여준다. 이른바 ‘현의 확장’으로, 바탕(玄)에 거문고의 실들이 길게 연결된 것 같은 현(絃; 현악기)의 표현이나, 건축 기둥과 같은 직선의 개입으로 빛을 밝힌 현(炫; 밝음)의 개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독창성의 표상인 추상미술에 대한 주체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작가는 순수 형식의 강조 속에서도 추상미술이 경계한 서술성을 부활시킨다. ‘한국 추상미술의 형성과 해체’ 측면에서 평면성의 한계와 가능성 모두를 성찰하는 것이다.
평면이 공간이 되는 ‘한국미’의 구현
평면이 공간이다. 김현식의 공간은 사유의 레이어(layers of reflection)다. 이는 현을 바탕으로 한 밝음과 예악(禮樂)적 사유를 보여준다. 스케일에 관계없는 공간의 깊이로 승부하겠다는 방식은 눈을 감고 우주를 보는 것 같은 종묘정전의 미감과도 연결된다. 속됨 없는 간결함 속에서 느껴지는 엄격함이 오히려 사고를 자유롭게 여는 것이다. 다양한 사유의 선들은 단색화가들이 언급하는 층(層)이나 적(積)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김현식의 직선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평행선을 유지할 뿐, 절대로 섞이는 법이 없다. 자하(子夏)가 시경(詩經)의 구절을 들어 공자에게 질문한 『논어(論語)』 「팔일(八佾)」의 회사후소(繪事後素)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의 뒤에 행한다.”라는 것처럼, 동양화에서 하얀 바탕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평면을 전제로 한 이후에 직선의 요소를 개입하여 마음의 깊이와 내면의 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형식으로서의 예(禮)는 본질이 있은 후에만이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덕목이다. 실제로 본질을 바탕 삼은 연휴에 꾸밈을 드러낸 ‘인격 수양’의 결과, 김현식 작가만의 공간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양을 얘기하면 섞이고 스미는 것으로 얘기하지만, 레이어란 각각의 개체 속에서 느껴지는 서로 간의 동화(同化)를 말한다. 캔버스에 선 하나를 긋는다는 의미는 무한한 절대공간에 세우고 싶은 작가의 의지다. 설치작업의 경우도 하나의 독립성, 이른바 선하나의 개별성을 작가의 의지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의 확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통과 현대와의 조우’라는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가는 동양의 정신성은 머물러 있음이 아니라, 근원성(거대 서사와 원칙)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말한다. 전통문화의 레이어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답지하는가를 풀어내 연결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는 뜻이다.
작가의 현실적 과제는 작업에서 오는 크기와 무게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있다. 현재 실험하고 있는 거대 캔버스 작업 속에는 스텔라가 확장해간 평면상의 요구가 에폭시의 깊이가 아닌 압축적 공간의 확장으로까지 펼쳐질 예정이다. 최근 호평받고 있는 ‘흰/검은/투명하고 단순화된 평면작업’들 속에서 선의 시각들을 ‘터치의 레이어’로 확장하면서 새로운 ‘김현식 시대’를 열 예정이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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